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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예산 추사고택, 추사 김정희를 만나다

2017.02.21(화) 11:34:13 | 쟈스민 (이메일주소:mee0102@naver.com
               	mee0102@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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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좌), 추사체험관(우)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며 독창적인 추사체를 발명한 추사 김정희의 고택을 방문했다.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배지가 있는 대정성지는 여러 번 가보았으나 정작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택과 기념관이 있는 예산은 늘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기필코 방문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꽤나 큰 규모에 놀랐는데 이곳에는 추사고택과 기념관 이외에도 추사체험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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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험관 내부

추사체험관부터 들렸다. 추사체험관에서는 10인 이상 사전예약에 한해 적게는 1,000원에서 많게는 4,000원까지 탁본체험, 난초그리기, 세한도그리기, 추사체써보기, 종이액자, 한지부채 나비부채, 원형부채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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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사랑채

추사고택의 안내문을 살펴보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1976년에 그 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월성위궁은 서울의 저택으로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던 곳이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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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영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대청 쪽으로 난 문은 모두 들어 열개 문으로서 위로 활짝 열 수 있어 개방적이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구조이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 화재로 불타버렸다. 또한 사랑채 앞에는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네모난 돌기둥의 해시계도 있다. 앞면에 새겨진 '석년'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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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올려다보니 목련이 꽃봉오리를 품고 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쯤이 될까? 봄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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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걸려있는 세한도와 기둥마다 적혀있는 김정희의 문장들

사랑채에는 국보 제 180호인 세한도가 걸려 있고 마루의 기둥마다에는 파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즐겨 쓰던 문장들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천하일등인충효'는 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요, '호공매화주일산'은 즐겁게 매화와 함께 한 산에 머물다라는 뜻이었다. 사랑채뿐만 아니라 안채의 기둥에도 있어 문장들을 찾아보는 재미와 하나씩 그 뜻을 파악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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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안채

추사고택의 안채는 ㅁ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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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내부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며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이므로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이었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실 주택 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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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영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인 권돈인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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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우물

고택 뒤틀에는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거의 믿거나 말거나에 가깝지만 떡잎부터 남달랐던 아이의 탄생에는 꼭 이런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다. 그 외에도 뒷산의 오석산과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다시 생기를 찾았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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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 내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추사기념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추사의 탄생부터 청나라 연경으로 학문길에 오르는 길이 디오라마로 만들어져 있으며 억울한 누명으로 제주도 유배지에서 보냈던 생활과 그 후 말년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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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린 시와 그림,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고 보물로 지정된 그의 인장과 벼루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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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남긴 어록들이 한 면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로 그가 추사체를 남길만클 명필가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천재적이어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때문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임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 시대를 살면서 한 획을 긋는다는 것이 어찌 그리 녹록할 수가 있을까? 명문가의 자손이었고 세살때부터 붓을 들만큼 천재적이기도 했지만 억울한 누명으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으니 남모르는 고통과 슬픔 또한 있었으리라 본다. 그런 고통과 슬픔마저도 예술로 승화시켰던 추사 김정희의 삶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곳, 예산여행길에 한 번 들려보는 것은 어떨까?



예산 추사고택, 추사기념관, 추사체험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8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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