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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고령박씨 종중의 박문수 일화

2015.07.22(수) 18:04:29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천안시 북면 은지리 44에 있는 고령 박씨 종중재실에는 어사 박문수 스토리가 담겨져 있는곳입니다.
박문수는 영조를 지지했던 노론과 반대당인 소론에 속해 있었는데 영조는 그를 등용하였다고 합니다.

영조에게 당당했던 박문수 일화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분무 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진 박문수는 영조6년에는 참판이 되어 왕을 모셨다. 모든 신하가 영조앞에서 고개를 들고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박문수는 고개를 들고 이야기 했다. 이걸 보다못한 좌의정과 우의정이 박문수를 꾸짖었다.

"그대는 전하 앞에서 무엄하게도 어떻게 고개를 들고 말하시오"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만 구부리는 불손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좌의정과 우의정의 말에 박문수는 영조에게 허리만 굽힌채 고개를 들고 영조를 바라보며

"전하, 임금과 신하가 마주보며 이야기하면 한결 부드럽고 거리감 없이 진심을 주고 받을 수 있사옵니다.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간신이나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영조가 박문수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며

"앞으로 대신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들고 말하도록 하시오."
 

고령박씨 종중의 나무

▲ 고령박씨 종중의 나무


여러개의 나무 기둥이 얽혀서 하늘을 향해 솟아 있습니다. 더운날 더위를 식힐 수 있을듯 해요.
 

고령박씨 종중에 세워진 비석

▲ 고령박씨 종중에 세워진 비석


이곳에는 1990년에 지은 박문수를 재향하는 충헌사와 1993년에 세운 충헌공박문수의 유물관이 있습니다. 충헌사에는 수부정기, 연보, 교지, 관복, 마패, 전적류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차장

▲ 주차장


이곳에서 박문수 묘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산행채비를 안해온 터라 그냥 이곳만 둘러보고 갑니다. 박문수를 키워낸 박문수의 어머니의 묘는 대전 유성의 박산에 있습니다. 박문수의 집안은 그다지 부유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박문수가 공부하는 것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생계를 꾸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박문수는 평생 재물을 가벼이하고 의리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빈천하게 살았지만 낙심하지 않았고 부귀할 수 있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사람이 박문수죠.
 

사람과의 대화

▲ 사람과의 대화


대청에 앉아 이곳에 온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더운 것도 잘 모르겠군요.

충헌사

▲ 충헌사


아쉽게도 이곳을 관리하시는 분이 충헌사 안쪽을 보지 못하게 하셔서 그냥 겉으로만 보고 나옵니다.

박문수는 암행어사가 아닌 어사였는데요. 4차례에 걸쳐 어사로 활약했는데요. 사실 어사보다 행정관으로서가 훨씬 더 유능했다고 합니다. 군정이나 세정에 밝았던 사람이라네요.

한옥의 지혜

▲ 한옥에 묻어난 지혜


백정의 조카가 된 일화

진주에 사는 박가라는 백정이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는데 이방의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좌수에 오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안 진주의 양반들이 백정인 박가를 고발해 박가는 좌수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좌수라는 임명장을 들고 있던 그는 충청도 서산으로 가서 집과 땅을 산다음 양반 행세를 했다. 서산 사람들이 박가의 핏줄을 의심하자 박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 양반이라는 증거가 있소."
"그 증거가 대체 무엇이오?"
"조정에 박문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의 조카요."

충청도 일대에 박문수가 내려와 민심을 살피고 있었고 근처 마을을 돌던 박문수의 귀에 자신의 당숙이 박가라는 소문이 들어가게 된다.

"박가는 어찌하여 나의 당숙이라 하였는가"
"내 그런 거짓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소만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지도 않으며 살았는데 내가 백정 출신이라 하여 좌수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사정을 들은 박문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정이 딱하니 내가 박가의 조카가 되겠소. 앞으로 누가 물으면 내 당숙이라 말하시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담벼락을 걸어보며

▲ 담벼락을 걸어보며


원수의 아들 조관빈을 살려준 일화

박문수는 그 성품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조태채와 원수같이 지내왔다. 조태채 또한 박문수가 탐탁치 않았는데 조태채는 이미 경종을 내쫓으려다가 사형당하여 세상에 없었다.

"내가 태채(콩나물) 머리는 먹지 않으니 항상 자르도록 하게"
" (왜 그러시지? 혹시 조태채 때문인가) 알겠사옵니다."


수년이 지난후 조관빈이 당론을 일삼고 사감으로 대신을 논척했다는 죄로 사형의 위기에 처했을때 박문수는 그를 옹호한다.

"전하 조태채의 아들 관빈의 죄는 벌하시되 사형만은 아니되옵니다."
"조관빈은 경이 그토록 싫어하는 조태채의 아들이 아닌가?"
"비록 개개인의 일은 사사로이 좋지가 않지만 이건 나랏일이니 올바로 따져야 합니다."
"경의 말이 옳소 내가 살려주겠소."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한옥의 소박함

▲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한옥의 소박함


푸르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고령박씨 중종 재실이 있고 이 뒷편으로 올라가면 장군대좌형의 명당 박문수의 묘가 있는 은석산입니다.

처마 끝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 처마 끝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박문수의 비봉산 일화

박문수는 평생을 지방을 순행하면서 살아왔는데 충청북도 지역의 비봉산 아래에 이르러 김진사댁을 방문했다. 김진사와 박문수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찌 이곳까지 오시었소"

"흘러가다보니 이곳에 오게 되었소이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보다 더 좋을수가 없습니다."

"값이 있는 청풍이요 임자 있는 명월은 될 수 없을까요?"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어가며 대화를 나누거 있었는데 이 대화를 김진사의 딸이 듣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격없는 대화를 나누는 객이 몹시나 궁금했던 딸은 저녁밥상을 올릴때 일부러 [뉘] 세 개를 밥위에 올려놓고 덮어놓았다.

올려져 있는 뉘를 집어어놓고 밥을 먹으면서 곰곰히 생각하던 박문수는 그 의미를 알게되었다. [뉘세요]라고 물은 것임을 알은 박문수는 밥상위에 생선 반찬을 보고 그 대답을 생각했다. 생선을 네 도막으로 잘라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김진사의 딸은 남겨진 밥상을 보다가 생선 반찬이 네도막으로 나뉘어져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고기가 네도막이면 한자로 그대로 하면 물고기가 네도막이지만 이는 어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객의 신분을 알아챈 딸은 다음날 씨암탉을 잡아 통째로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라구요.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모든 일화가 박문수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청렴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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