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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대를 이어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국가에는 충신

2015.06.05(금) 17:18:31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공휘유경, 김공휘홍익라는 이름을 들어본적은 없었습니다.

각각 효자와 충신을 상징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산88-1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효자문이 세워진 것은 정말 오래되었는데요. 신라시대뿐만이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에서도 세워졌다는 것을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효자문은 효자를 표창하여 널리 본을 보이는 뜻으로 세운 정문(旌門)입니다.
 

김공휘유경 충신문

▲ 김공휘유경 효자문


이 효자문은 김공휘유경 (서기 1669 ~ 1748년)께 10세때 친상을 당하여 예법대로 복을 입지 못한 것을 애통하신 나머지 공의 춘추 71세(1740년)에 추복을 하고 조석으로 곡을 하여 여묘 3년간 슬픔을 다하신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문이라고 합니다. 대단하네요. 얼마나 기리고 싶었으면 그 나이에 3년동안 곡을 다했을까요. 공의 자는 덕유요 호는 용곡이며 1748년 무진년 7월 8일에 졸하였을때 나이가 80세였다고 합니다.
 

김공휘유경 효자문안내

▲ 김공휘유경 효자문안내


영조는 공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식물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평생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충언으로 일관하였으며 일신상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풍파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네요.

이 효자문을 세우게 한 것은 바로 영조로 영조 27년 (1751년) 신미에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였습니다.

효자문 엿보기

▲ 효자문 엿보기



마음을 다해 부모를 모셨던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점차로 효에 대한 생각이 희석되어져가는 이때에 이 분같은 사람을 이렇게나마 만나게 된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김공휘홍익 충신문

▲ 김공휘홍익 충신문


아까 보았던 효자문의 주인공의 증조부 되는 사람의 충신문입니다. 김공휘홍익 (서기 1581 ~ 1636)께서 병자호란때 연산현감으로 제직중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 험천땅에서 중과부적의 적병과 대치하여 일척단검으로 항전하다 1636년 12월 27일 춘추 56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김공휘홍익 충신문 안내문

▲ 김공휘홍익 충신문 안내문


장렬히 순국한 이의 충절을 기려 건립된 정문이며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에 있는 충곡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어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공의 본관은 경주요 자는 익지며 호는 묵재라고 합니다. 영조 17년 (1741년)에 나라에서 정려의 명이 내려지고 정조 18년(1769년)에는 충민이라 증시되어 현판을 재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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