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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계룡산에서 '원효대사'를 찾다

2009.04.07(화)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넷포터] 몇년전 우연히 계룡산의 원효대라는 수행터와 돌로 만든 오래된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세워진 역사야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수행처인 초막이 박정희 정권 시절 무지막지하게 철거되고 우물은 메워져 텅 비어 있지만, 돌로 쌓은 화장실은 그 모습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작년 4월 21일 막연한 이야기만 듣고 길을 나섰다가 죽을 고생만 하고 찾지 못한 원효대를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 볼 요량으로 나에게 원효대 이야기를 해 주신 구룡암 주지 지산스님과 함께 나섰다.

길이 탐방로가 아니고 너무 위험하니 알리지는 않겠다.
나야 지역민이니 그렇다 쳐도 일반인들이 산행을 위해 접어 들게 되면 벌금과 함께 처벌을 받게 되니 이점을 유의하시기 바란다.
  계룡산에서원효대사를찾다 1  

계곡을 거슬러 오르고 또 오르고….
예전의 길 흔적을 쫓아 오르는 길은 인적이 끊김으로 해서 온통 진달래와 철쭉이 자라 길을 감추어 버렸다.

스님의 기억에 의지해 오르다 보니 숫제 길이 아니다.
예전 수행자들이 다닐 때에도 아마 제대로 다니기는 힘들었을 길 같았다.
대자암에서 길을 들어 오르기를 1시간여….
드디어 인공의 흔적들이 눈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북쪽에는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위해 돌성을 쌓고, 계곡의 급하게 경사진 비탈에 판석들을 괴어 평지를 조성하고 제법 너른 터를 만든 것이 보였다.
아마도 10여명 정도는 충분히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계룡산에서원효대사를찾다 2  
  계룡산에서원효대사를찾다 3  

옛터의 군데군데 나무가 있는 것은 역사성을 무시하고 철거를 감행하면서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쯤에서 원효 대사가 누구인지 부터 알고 가보자.

원효 元曉 (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 신당(新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자신의 재산을 불교에 납부하고 초개사(初開寺)를 세웠으며 자신이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650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 하였으며 다시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났다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一體有心調]을 깨닫고 혼자 돌아와서 후에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고 전해오고 있다.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 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인 무덤이라 생각하게 되니 편안치가 못하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크다.

우리나라 각지의 유명산에는 원효대, 의상대라는 명칭의 수도터가 많이도 있다.
모두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거처하며 수련한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워낙에 유명한 대승들이니 아마도 그 이름에 곁붙여 유명세를 타 보려는 생각이었거나, 아니면 원효대사처럼 큰 깨닳음을 얻고자 절치부심 목숨을 내 던지듯 수행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지은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계룡산에서원효대사를찾다 4  

이곳의 역사나 원효대사의 수행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럼 이 수행처에는 과연 몇명이나 상주하며 수행을 했을까?
이곳의 상주인원을 추산해 볼 근거는 물론 다듬어진 초막의 터를 보면 되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많이 무너져 버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것이니, 아직도 그때의 모습 그대로 있는 화장실의 모습이나 규모, 만든 과정을 되짚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계룡산 그것도 이 지역의 계곡에 흔한 판석들로 경사에 어우러지게 벽체와 지붕을 올린 것과 두칸의 용변구를 둔 것, 그리고 무겁고 거대한 판석을 올려 지붕을 만든 것 등을 고려해 보면 최소한 10여명의 사람들이 수행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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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 수없는 오래된 돌화장실의 앞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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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으로 디딤돌을 한 잘 만들어진 용변구의 좌우 모습

꿈쩍도 하지않고 그자리에서 고스란히 세월을 이고 있는 돌화장실에 지금은 스산한 바람에 날려온 낙엽으로 가득하지만 한 때 피를 쏱는 고행의 길을 통해 깨닳음을 얻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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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화장실의 북쪽 아랫부분에는 사람이 들고 날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 두었는데, 어쩌면 하찮을지도 모를 분변 조차도 남김없이 자급자족을 위한 채소재배에 재 사용하거나 주변 동물들의 먹이로 사용되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여 수행 속에서도 자연과 하나되려는 의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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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의 표지석이라 할 만한 거대한 바위 아래는 최근[?]에 누군가가 만든 듯한 제단이 있고 촛불의 그을음이 바위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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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제 부터인가 누군가는 큰 깨닳음을 위해 온몸을 내 던진채 길도 제대로 없는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지만 이제는 모두 무너져 내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세월 속에 그저 그들의 마음 쓴 흔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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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 나오는 길에 세월의 흔적속에 박제 되어 버린 산수국의 헛꽃과 씨방이 무심한 바람에 흔들리며 세월의 덧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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